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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9 ] [SF저널] 한인 최초로 나스닥에 상장한 황규빈

단돈 50달러로 미국 26위 부자가 되기까지 한인 이민 100년사에 최초로 기업을 키워 나스닥에 상장한 대표적 한인 억만장자

황 규빈 (Kyupin Philip Hwang)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손꼽히는 황규빈 회장을 써니베일에 소재한 그의 오피스에서 만났다. 햇볕이 잘드는 널찍한 사무실에서 그와 생강차 한잔을 나누며 그의 삶과 독특한 경험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뭇 어린이와 같은 순수하고 밝은 미소가 배인 얼굴과 소탈한 성격의 그는 한국의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 고르바초프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 뿐 아니라 모하메드 알리,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 윌리엄 휴렛등 각계 인사들과 다양한 친분을 맺어왔다. 한국으로 부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도 수여받았다. 한국에서 개최된 기독교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에서 준비위원으로 활약해 여의도 광장에 약 100만명이 참여한 대 성황을 일궈냈다. 결코 평범치 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아메리칸의 드림을 이룬 황규빈 회장의 삶을 조명해 보며 많은 한인 후세들이 그로 부터 세상에 대한 도전과 개척정신을 배울수 있기를 바란다.

황규빈 회장은 1936년 12월 함경남도 함흥에서 장남으로 출생했고 남동생 네명과 여동생 둘이 있다. 1950년 12월 한국전 당시 우여 곡절 끝에 가족과 헤어져 남한에 홀로 피난을 갔었다.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친구 김종환이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었는데, 미군들이 남한으로 후퇴할때 미군 트럭에 김종환과 황회장을 태워줬고 둘이 함께 피난생활을 했다. 김정환은 그를 보살피던 미군 장교가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양자로 데려왔다. 도미한 김정환이 황회장에게 미국에 와서 공부하라고, 미국이 한국생활보다 훨씬 좋고 공부할 여건이 좋다고 편지를 통해 알려줬다. 당시 황회장은 연필도 팔고, 구두 닦이도 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했으나 끊임 없이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황회장은 꿈을 잃지 않고 돈을 벌며 공부를 지속했다. 1960년대에 한양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했고, 국가 유학시험에 합격후 1964년 도미해 1968년 유타 주립대 전기공학과 졸업 후 웨인 주립대 전기공학 석사를 마쳤다. 후에 유타 주립대에서 명예공학 박사 학위를, 숙명여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러시아 극동 교통 통신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포드, NCR, 보로스(Burroughs)사 등에서 근무하다 1975년 텔레비디오(TeleVideo, Inc)주식회사를 설립해 회장으로 취임했다. 설립한지 8년후 1983년 재미 한인 최초로 미국에서 회사를 상장시켰다.

1983년 포브스가 발표한 미 400대 부호 명단에 한국인 사업가가 포함되어 한국 사회가 깜짝 놀랐다. 그는 창업 8년 만에 나스닥에 상장시키며 큰돈을 손에 쥐었다. 포브스 부호 명단에 진입할 당시 자산은 6억달러였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2억3000만달러)보다 세배나 많았다. 이후 회사 가치가 20억달러까지 치솟으면서 황 회장의 주식 자산도 12억달러까지 늘어났다.

하바드 대학 비지니스 스쿨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쳤고, 1981년 아메리칸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American Academy Golden Plate)를 비롯해 대한민국 대통령 산업 훈장, 미국 국회에서 100년에 한번 수여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수상했다. 1993년 죠지 부시 미대통령 첨단 기술분야 자문위원으로, 1991년 러시아 Komi 공화국 대통령 경제 고문으로 위촉받기도 했으며, 1998년 실리콘밸리 한미 상공회의소 회장을, 1999년 연변 과학기술 대학교 석좌교수, 1999년 민주 평통 자문위원, 2002년 FIFA 월드컵 코리아 북가주 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라 불리운다. 미국의 역사는 기회에 도전하는 이주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누적되면서 이루어져 왔다. 한국인들 또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미국이민 100년사에 이러한 기회를 잡은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산업사회를 거쳐 디지털시대를 맞으면서 미국사회에서 '기회'를 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황회장은 거듭되는 경제적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려가는 용기와 배짱, 도전정신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우뚝 선 대표적 롤모델로 거듭났다.
그는 도미 당시 미군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우여곡절끝에 몸을 싣고, 3등칸에서 배멀미에 시달리며, 잡역을 해 가면서 주머니에 50달러만 들고 미국땅을 밟았다. 황 회장은 접시닦이, 콘크리트 공장의 잡역부, 버스안내원, 화장실 청소등 각종 궂은일들을 하며 등록금을 마련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마치고 포드자동차에서 연구개발원으로 일하다가 보다 전망이 밝은 컴퓨터 계통의 회사로 옮겼다. 보로스, NCR 등에서 일하며 약 6여년간 소형 컴퓨터제작에 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학업을 계속하며 경영 능력을 키웠다. 실리콘밸리가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하던 1975년 그는 6년간 모은 9천달러를 초기 자금으로 투자해 쿠퍼티노 단독주택의 차고에서 텔레비디오를 창업해, 게임용 모니터와 PC끼리 자료를 주고받는 PC네트워크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1980년대 돌풍을 일으켰다.

소자본으로 시작한 사업은 고군분투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비디오 게임기계의 보조장치인 텔레비젼 모양의 모니터를 제품으로 선보이면서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되었다. 점차 컴퓨터 단말기를 생산, 세계시장을 석권해 나갔고 1983년에는 주식을 나스닥에 상장후, 이후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80년대 중반부터 PC보급이 본격화되면서 컴퓨터단말기 사업이 타격을 받게 됐고, 90년대 중반까지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그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네트워크 PC라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냈다. 이때가 1997년이다. 네트워크 PC는 하드웨어 부분인 몸체, 모니터, 스피커로 구성된 기존의 PC와는 달리 하드웨어와 모니터, 스피커가 하나로 결합된 신제품인 것이다. 그는 또한번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창조해 냈다. 2년주기로 흥망이 교차하는 실리콘밸리 실정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일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그의 좌우명과 도전정신이 오늘날 그를 미국내에서도 성공한 기업인으로 만든 것이다.

황규빈 회장이 살아온 파노라마 같은 인생 여정속에는 드라마 같은 인생담들이 많이 숨어 있다.

초기 미국 유학당시 학기중에 수중에 단돈 몇불밖에 남지 않아 마켓에 가서 작은 빵하나를 살 능력도 안되 제일 싼 가격의 작은 크래커를 사들고 학교로 돌아와 크래커 한조각과 물한컵으로 끼니를 해결한적이 많았다. 그런데 정말 크래커 한 조각 살돈도 없이 완전히 돈이 하나도 없이 똑 떨어졌다. 당시 교회에도 다녔지만, 교회에 가서도 누구에게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허기져서 힘없이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기숙사 문앞에 박스하나가 있었고 황회장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뭔가 하고 열어보니 각종 음식 통조림이 한박스 있었다. 교회에서 식당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통조림등을 정리하다가 혹시라도 한인 유학생에게 필요할지 모른다 생각해서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는 그 박스를 보고 너무 기쁘고 감사해 눈물이 핑돌았다. 통조림은 보관한지 오래되고 해서 겉에 싸여있던 종이로된 설명서들이 거의 다 없었다. 매일 보물찾기 하듯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는 깡통을 열어서 하루에 한개씩 먹었다. 마지막 깡통을 먹은 날이 정확히 방학을 하는 날이었고, 방학에는 여지 없이 고된 일을 찾아 했었다. 텔레비디오 회사 설립후 무거운 컴퓨터 한대를 들고 한국의 공장에 상담을 하러 가게되었는데 비행장에서 공장까지 갈 교통비가 거의 없어 무거운 컴퓨터를 들고 몇시간을 걸어 공장에 가곤 했었다. 비행기에서 만났던 지인들이 차를 타고 먼지가득한 길을 걷고 있던 그의 곁을 휙 달려갈땐 괜히 그들의 눈에 띄어 신세지기도 싫고 부끄럽기도 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터덜터덜 걸었던 적도 많았다.

아메리칸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American Academy Golden Plate)를 수상했을 당시, 미 전국 각지에서 선정된 최고의 학생들 300여명이 달라스에 모였고, 전미에서 모인 수상자들, 즉 각계의 훌륭한 인물들이 이 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등을 20분간 강의를 하도록 되었다. 황회장은 학생들 앞에서 그의 인생역전을 이야기해주었고 당시 선정된 똑똑하고 유복한 미 청소년 300여명은 상상해 보지도 못한 전쟁과, 피난, 미국유학생활, 기업 설립등에 얽힌 그의 치열한 삶에 대해 들으며 대부분 눈물을 뚝뚝 흘렸다. 향후 많은 학생들이 감동적이었다는 편지를 황회장에게 보냈고 황회장은 학생들의 멘토로 성실히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누군가가 도움을 받는다면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최초 상장 당시 18달러였던 주가는 6개월 만에 50달러를 훌쩍 넘기며 시가 총액 20억 달러가 됐다. 포브스지는 미국 400대 부자 목록 26 위에 그를 올려놓았고, 미국 주간지인 포춘, 타임 등이 앞다퉈 황회장의 기사를 실었다. 이렇게 유명해진 황 회장은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 빌 게이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등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빌 게이츠와는 지금도 간간히 통화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에게 한인 후세들에게 전해줄 조언을 부탁했다. 지금 2세 등 후세들이 정말 성실히 부지런히 노력해오는 1세들의 정신을 배워야 하며,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다 보면 외로움이 따라올 수 있는데 절대 포기 하지 말고 노력하라고 전한다. 그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의 고등학교 은사의 조언이 항상 가슴에 남았고 귀중한 지침이 되었다고 스승의 말을 인용했다. 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인생을 살다 보면 기회가 오게 되는데, 준비가 되어있어야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좋은 기회가 왔는데 준비가 안되어 있어 기회를 잃으면 두번 다시 똑 같은 기회가 오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의 예를 들자면 대학원 석사 과정과 인텔이 주관한 마이크로 프로세서 연구 과정을 마친 덕분에 그는 컴퓨터의 핵심인 반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됐고 그가 사업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그가 인생 역전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2004년 그의 자서전 "버티지 못 할 시련은 없다"가 출판되어 많은 독자들이 그의 삶을 통해 도전의식과 힘을 얻고 있다.

그는 지금도 흔치 않은 억만장자다. 그는 부동산 사업을 하는데, 아파트 1,000채이상, 객실 150개 이상의 대규모 호텔들 및 대규모 쇼핑몰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유학시험을 치루면서 아내를 처음 만났고, 아내는 오스트리아로가서 식품공학을 전공후, 미국 유타 스테이트대학에서 영양학 석사과정을 밟을때 황회장과 다시 만나 결혼했고, 카이져 병원에서 영양사로 장기 근무후 은퇴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한인 후세들이 대학 졸업후 신앙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인 종교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

황규빈 회장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따뜻한 아내와 뉴질랜드등 세계 각지로 여행을 두루 다니며, 또 두딸 가족과 함께 부동산 투자 사업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며 실리콘 밸리 한인사회에 주요한 여러 봉사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는 한인들도 주류사회의 비지니스 상황을 파악하도록 시각을 넓히고 함께 지역사회에 어우러져 노력하며 이 사회에서 한단계 더 발전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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