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을 자처했던 좌파사기꾼 리영희의 추악한 인생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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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비판 2005년 9월 낙서장
2020. 4. 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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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5년 9월
한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리영희와 左派는 더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된다
이동복
毛澤東과 문화혁명 일방 美化
反美·대한민국 현대사 왜곡
386을 사상적 혼돈으로 인도
리영희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實在가 아니라 선전 문구였다.
레닌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쓸모 있는 바보」였다. 사실과 선전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저주했던 어리석은 남자였다. 그것이 오늘 나의 눈에 비친 리영희의 모습이다.
李東湖 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現 북한민주화 포럼 간사
1959년 울산 출생. 연세大 신학과 졸업. 全大協 연대사업국장 겸 서총련 연대사업국장, 전민련 결성준비委 학생대표 역임. 북한민주화포럼 간사.
내 인생을 바꾼 리영희와의 만남
리영희 교수의 글을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후반이었다. 나는 朴正熙 대통령의 유신통치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20代 초반의 청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반공교육」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과 문제의식이 주된 이유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너무 짧았고, 사상을 얘기할 만큼 내 공부가 깊지도 않았다. 다만 「공산주의는 惡이고, 자본주의는 善이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주장에 식상해 있었다.
그런 내게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은 충격이었다. 李承晩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日帝의 앞잡이였고, 日帝에 저항하였던 세력은 우리가 빨갱이라고 저주했던 左派(좌파)라고 주장했다.
식민지 해방운동의 주역은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을 건설한 金日成 세력이었고, 내가 대한민국의 은인이라고 여겼던 미국은 흉악한 음모를 지닌 대한민국 건국의 배후 조종자였다. 대한민국은 자주 독립국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은 다 허물어졌다. 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알고 있었던 知的(지적) 저능아였다.
리영희의 책에서 알게 된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를 지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자 영웅들이었다.
나와 리영희의 만남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나의 스승 리영희는 내 인생의 좌표였고 길잡이였다. 그는 나의 삶의 행로를 바꾸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사생아 대한민국을 지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회혁명이 필요해 보였다. 공산주의 사상만이 유일한 代案이었고, 다른 사상들은 인간을 교묘하게 속이는 위선의 허접스러운 사상이었다. 나의 사회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청년 시절 나의 이런 신념은 한 번도 도전당하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붕괴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이은 붕괴는 내게 리영희와의 만남만큼 충격이었다. 탈북자들과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참혹한 실상은 사회주의와 주체의 나라 북한에 대한 동경을 깨부셨다.
공산주의 나라에는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가 없었고, 자본주의 나라보다 더한 독재와 관료주의, 인간에 대한 지독한 소외만이 있었을 뿐이다.
내 청년기의 사상과 행동은 정당성을 상실했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全斗煥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진지한 성찰 없이 사회주의를 택했던 나의 非지성적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나를 사회주의로 이끌었던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을 다시 한 번 정독했다.
한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개인으로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진지하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다.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편에서는 좌경 의식화의 원조로, 다른 한편에서는 386의 「사상적 恩師」로 불린다.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 인물이다. 그가 386에 끼쳤던 영향을 감안하면 그런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외할아버지를 죽인 머슴을 憧憬
1989년 한겨레신문 入北 취재계획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리영희 당시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리영희는 지난 3월에 발간된 「대화」라는 책에서 소년 시절 社會主義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외삼촌 최모린을 존경했다고 밝혔다. 그 다음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巨富였던 외조부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사라진 뒤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세 번에 걸쳐 외조부의 재산을 털고 끝내 외조부를 총으로 죽인 머슴 문학빈(그후 일본군에 협조한 것으로 밝혀짐)을 憧憬(동경)하며 성장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미군 통역관으로서의 軍생활과 외신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軍의 불합리와 부패, 그리고 당시 기자 사회에서 나타난 부조리와 연줄관계에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리영희는 「그 代案으로서 중국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중국 毛澤東(모택동)의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1965년에 일어났던 文化革命(문화혁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의 사상적 기조를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그후 일관되게 親北 논조를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는 동경하는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다.
毛澤東과 文革에 대한 동경
毛澤東 어록집을 들고 환호하는 홍위병들. 리영희는 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일방적으로 합리화했다.
리영희는 毛澤東의 공산혁명과 문화혁명을 동경하고 미화했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그의 저서에 나타나는 일관적인 특징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조롱, 철저한 反美의식, 대한민국에 대한 자학적 역사인식이다.
리영희는 1974년 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에 수록된 「대륙중국에 대한 시각조정」에서 毛澤東과 문화혁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리영희는 쿠바 특파원인 루이 암스트롱의 글과 한국외국어大의 안경준씨의 글을 인용한다.
『새로운 大약진이 마련되고 있다. 집단경제는 모든 시련을 넘어 인민공사는 반석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모든 기적을 나에게 보여 준 이 나라 인민에게 축복이 있어라』(루이 암스트롱)
『(인민공사에 대한) 인민의 뿌리깊은 개인경영사상과 집단수용소에 대해 느끼는 환멸감은 자본주의적 요소가 끊임없이 성장되도록 부채질할 것이며 공산독재의 멸망을 촉진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안경준)
여기서 리영희는 「문화혁명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중국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라며, 부정적 평가는 잘못된 선입관이 개입됐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것과, 계급분화의 제 조건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인간사회를 보장·발전시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자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닌 운동』이라고 본다.
리영희는 毛澤東이 문화혁명을 일으키게 된 배경이 첫째, 중국공산혁명을 일으키던 당시와 혁명이 성공하고 난 후 사이에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이 상이함에 따른 새로운 모순과 갈등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毛澤東이 게릴라 활동을 하던 당시의 인간형_리영희 표현에 따르면 철저한 평등·우애·동지애·자기희생·전체에의 봉사 그리고 극단적인 절약 등으로 상징되는 인간형-과 권력을 장악한 뒤에 보이는 현실적 인간형 사이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리영희는 이를 『스탈린식의 「물질제일주의」와 毛澤東식의 「인간제일주의」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 사회주의의 특징은 생산수단의 사회화, 즉 국유화가 이루어지면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로 나뉘어진 모든 계급은 소멸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토대 위에 생산력은 급속히 발전되고, 인간의 의식 또한 변화된다고 보았다.
중국 공산당의 주장을 無비판 수용
리영희는 『이러한 태도는 물질 변화에만 주목한 물질중심주의적 태도』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스탈린과 毛澤東은 대립된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생산력이 발전하거나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회주의가 이루어져도 舊시대적 의식_자본주의적 또는 前근대 봉건적인 의식, 다시 말해 이기적 욕심_은 남아 있어서 사회주의의 완성을 끝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毛澤東은 「사회혁명과 별도의 인간의식 개조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영희의 입장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공식 견해를 無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리영희에 따르면 『劉少奇(유소기)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생산력이 발전되면 인간의 사상개조가 이루어진다는 관점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劉少奇는 中共이 급속한 공업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긴박성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욕구에 호소하는 물질적 자극책을 썼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농촌에서는 사유지의 보장과 생산결과에 따른 생산이윤의 보장 등이고, 공업 분야에서는 전문가와 기술자의 우대, 노동자들의 이들에 대한 종속, 관리인 중심의 경영제도, 41종에 달하는 보너스제 도입 등 현재 소련식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毛澤東이 보기에는 단기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는 효과는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을 조장함으로써 자본주의에로의 역행현상이 일어나 중국 사회주의혁명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는 것이다.
毛澤東 개인 숭배 옹호
리영희는 毛澤東과 劉少奇의 권력투쟁을 노선투쟁으로 미화했다.
이어서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毛澤東을 극찬하고 있다. 그는 한 서방의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 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혁명은 못 했다. 毛澤東은 공업화와 인간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 놓았다.
리영희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문화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全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인간의 평등사회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고 했다. 그 노선의 실현이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는 1977년 발간된 「우상과 이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下放(하방: 지식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노동을 시키는 운동)」을 「인간우선주의」의 실천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화혁명의 과정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그 예로 『가장 극심한 비판을 받았던 劉少奇도 北京 교외에서 현재 再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리영희의 毛澤東 숭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毛澤東은 인간적으로 그릇이 매우 큰 영웅의 풍모를 지녔고 동시에 사상가·교육가·정치가·전략가·詩人 등 다양한 자질을 한몸에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리영희는 더 나아가 『毛澤東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리영희는 毛澤東의 「개인숭배」에 대해서도 색다른 분석을 했다. 아마 송두율式의 「내재적 접근법」의 원조가 아닌가 한다.
『개인숭배를 중국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된다. 외부의 시각으로 중국 인민들의 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중국처럼 장구한 세월 동안 정치적 억압과 빈곤과 비참의 역사를 살아 온 중국민중에게는 그 생물학적·인간적 존재의 기본조건을 처음으로 해결해준 지도자와 그 인간에 대한 감정은 숭배에 가까운 「거의 절대적인 존경」이 있을 수 있다』
또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毛澤東의 개인숭배는 차이가 있다고 강변한다.
『스탈린은 당과 정부로 구성되는 관료화된 권력체계의 커다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관료적 방법으로 숭배를 강요했다. 반면 毛澤東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휘한 당 관료기구를 타파함으로써 민중과 자기를 직결시키는 데 대한 존경이다. 홍위병 운동은 인민대중의 지성과 에너지에 의거한 결정과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운동이라는 것이다. 毛澤東의 이러한 대중의 힘에 의거하는 방식이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방식과의 가장 큰 차이다』
뿌리 깊은 反美, 대한민국에 대한 경멸
리영희는 자본주의를 경멸한다. 그 代案으로 그는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毛澤東의 사상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나라를 대표하는 미국은 증오한다.
리영희는 미국은 전쟁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구조를 지닌 나라이며 全세계에 걸쳐 제국주의적 침략을 일삼는 나라로 보았다. 「대화」라는 최근의 책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밝혔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정치·군사·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리영희의 미국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심각한 빈부격차, 경제·사회의 부정부패, 인종차별, 기업의 냉혈적 인사제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몰인정적인 생존경쟁 등 인간관계의 냉혹한 단면을 지닌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철저한 이기주의적 자본주의 나라이다. 북한 核문제의 본질도 미국의 전쟁 없이 살 수 없는 제국주의적 침략적 속성에서 찾아야 한다』
리영희는 1994년 출간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평화의 가면 아래 지구상의 도처에 불씨를 뿌리고 다니는 국가가 있다. 진정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 없는 삶을 원하는 사람은 그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리영희에 따르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상 최악의 나라다. 과연 그런가? 역사는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사회주의 나라가 그의 분석과 달리 최악의 나라였음을 보여 준다.
심각한 관료주의의 폐해와 부패는 자본주의 나라보다 훨씬 심각했고, 인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공산독재자들의 철권통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실제적인 삶은 지상낙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지상낙원이라던 사회주의 나라의 인민들은 그들 스스로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리영희가 그토록 혐오했던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을 선택했다. 사회주의 나라들은 전쟁이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그는 허상을 보았고, 지금도 그 허상을 좇고 있다. 그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實在(실재)가 아니라 선전 문구를 사실로 착각한 것이다. 레닌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쓸모 있는 바보」였다. 사실과 선전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저주했던 어리석은 모습이 오늘 나의 눈에 비친 리영희의 모습이다.
대한민국史는 親日·독재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
리영희는 1945년 이래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美 제국주의의 남한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와 이에 결탁한 李承晩과 朴正熙를 비롯한 독재정권과 그들의 계급적 기반인 親日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반면 그는 얼마 전 발간된 「대화」에서 북한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애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된 나라이며, 새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親日派를 비롯한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된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대한민국觀은 「우상과 이성」에 잘 나타나 있다.
『남을 안방에 모셔 놓고 주인처럼 섬기기 20여 년, 해방 후부터 치면 32년인데, 그만하면 됐지 얼마나 더 모셔야 종의 근성이 풀린다는 말일까. 이런 정신적인 기형아, 생태적 불구를 만드는 데는 이 나라에 대해서 주인행세를 해 온 그쪽의 잘못도 있다. 사실 그 잘못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중하다』
리영희가 본 8·15 광복 당시의 남한은 지배자인 미국과 이에 결탁한 세력들에 지배된 무법천지의 사회였다.
『과거에 남한에 잔존해 있던 악질적인 반역자들과 親日派들이 북한에서 도피해온 같은 부류의 악질분자와 결탁하여 남한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美 군정의 비호 아래 도처에서 온갖 테러와 불법행위 폭력을 자행했다. 거기에서 남한 민중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당시의 無정부 상태의 원인은 한마디로 美 군정과 이들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조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리영희의 당시 해방정국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남한을 사회주의 나라로 만들려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폭동이 실체적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의도적으로 빠뜨리고 있다.
리영희에 따르면, 분단의 책임도 미국에 있다. 38선을 그은 것도 미국이다.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
「대화」에 나와 있는 광복 이후의 역사에 대한 그의 평을 보자.
『1945년에서부터 1948년까지 미국 군대에 의한 점령통치기구인 군사정권下에 놓였지요. 일본 총독통치의 변형이었지. 1948년에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李承晩이 남북 통일국가 수립을 거부하고, 국토분단을 전제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한 것도 李承晩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이 있었지요』
리영희는 李承晩을 미국의 앞잡이로 보았다. 「대화」에서 그는 李承晩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李承晩의 애국심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야심 충족, 즉 권력 획득의 한 방편이다. 李承晩은 타협이나 관용을 모르는 전제주의 제왕형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장한 과정과 정치인으로서의 행적을 볼 때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왕조체제 같은 한국을 상상했다』
그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李承晩을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李承晩은 민족의 통합보다 분열을 중시하고, 남북의 화합을 극렬히 반대하고, 자기의 패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李承晩은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서 上海임시정부나 그 밖의 해외 독립운동에서 분파주의, 패권주의자로 지탄을 받았던 사람이다. 임시정부에서도 총통을 주지 않으면 반드시 이탈하고 깽판치고 했던 그런 위인이다. 그래서 그는 임정생활을 다하지 못하고 절교가 되어 미국에 들어가 프린스턴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다』
리영희의 분석에 의하면, 「李承晩은 철저한 미국 숭배주의자로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물론 초보적인 사회개혁도 적대시 했다」고 한다.
그는 「자유인, 자유인」에서 광복 이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광복 직후와 대한민국 수립으로 시작되는 민족 광복의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날뛰는 反민족주의자들과 反통일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李承晩이라는 反민족 광신주의자의 정치적 욕망이 충족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이 민족의 분단은 굳어졌고 이 사회의 민주주의 실현의 염원은 멀어져 갔던 것이다』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리영희의 북한관은 따져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金日成 체제의 인권탄압과 경제난이 불거져 나오던 1994년에 발간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리영희는 북한에게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남쪽 사회는 외세의존과 상당한 국가주권을 양도한 代價로 얻어진 것이다.
북쪽은 반대의 철학으로 나라 만들기를 서두른 결과 높은 민족적 자존과 사회구성원 상호 간의 도덕적 생존양식, 그리고 동포애가 감도는 순박한 인간형 등의 사회를 실현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공평한 관측자, 방문객들에 의해서 그 측면의 사회적 善이 확인되었다』
1994년 전쟁 위기로 치닫던 북한 核문제에서도 그는 북한의 편에 섰다.
北核은 미국 책임
그는 1991년 7월 북한이 원자력기구와 개별협상에 가서명한 것을 환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가시지 않고 있는데 이는 북한 核보다는 더욱 위험스러운 미국이라는 원인이 있다』고 했다. 소위 「북한 核」의 원인과 책임은 북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미국도 같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核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미국의 위협 앞에 공포감을 지닌 북한의 이유 있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盧武鉉 대통령이 『북한의 核보유는 일리가 있다』고 한 발언은 리영희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盧武鉉은 「정신적인 386」의 한 멤버이기 때문이다.
리영희의 잘못된 예언과 역사인식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은 「10년 동란」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을 毛澤東식 「인간제일주의」의 소산으로 보았다. 사진은 홍위병들이 반동으로 몰린 시민을 핍박하는 모습.
리영희가 극찬했던 인류사상 최초의 거대한 「인간개조 실험」인 문화혁명은 실패했다. 애초부터 잘못된 가정에 입각한 오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문화혁명에 대한 평가는 당시 리영희가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홍위병들의 폭력에 의한 철저한 인간성 파괴와 문화파괴가 만연했고, 사회적 생산력의 저하에 따라 중국 인민은 고통을 겪었다. 중국 인민들은 이제 문화혁명을 「10년 동란」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 역사학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는 「무질서의 지배자 毛澤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사회상과 폭력성을 기술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구가 되거나 평생토록 치유되지 못할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문화혁명에 대한 자신의 오류를 변명했다.
이를 요약하면 「당시 나는 문화혁명의 전모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식인으로서는 도무지 취할 수 없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다.
전모를 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인류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떠들었다는 말인가? 당시 그의 선전에 경도되어 잘못된 사상과 인식으로 자신의 젊음을 소모한 사람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것 아닌가?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혁명을 남한 사회의 독자들에게 전할 때, 『자본주의 사회의 병든 생활방식과 존재양식에 대해서 대조적인 삶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鄧小平은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본주의 방식의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했다. 리영희 자신이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야 말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류가 발견한 최선의 제도라는 사실은 입증됐다.
[리영희의 비뚤어진 대한민국觀]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李承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①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며, 미국은 남한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②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다. 李承晩의 남한 정부수립 운동은 민족분단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美 군정은 처음부터 李承晩의 남한 정부수립 운동을 지원했다.
③ 대한민국은 미국의 앞잡이들과 親日派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④ 韓美동맹은 미국에 대한 예속의 결정판이다.
⑤ 李承晩 정권은 사회제도 개혁을 거부했다.
⑥ 李承晩은 上海임시정부와 해외독립운동에서 비난받았던 분파주의자다.
소련 붕괴 이후 각종 기밀문서가 알려지면서 위의 주장들은 근거가 희박하거나, 일방적인 주장임이 드러나고 있다.
리영희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미국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無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또한 북한의 「反帝·反봉건 민주주의혁명론」의 이론구조와 유사하다.
[군사분계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킨 것은 소련]
38선을 넘어 월남하는 일가족. 38선은 소련에 의해 정치분계선으로 변질되기 전에는 엄격한 정치적 분계선은 아니었다.
미국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보는 견해는 그 주장의 근거로 미국이 38선을 획정했으며, 미국이 남한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한다.
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이는 미국합동참모본부가 1947년 9월22일에 작성한 평가서에 나타나 있다. 미국은 1948년 남한에 통일정부 구성이 불가능해지자 서둘러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고 주둔미군을 조속히 철수하고자 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9월15일부터 駐韓美軍 철수를 비밀리에 개시하여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을 남기고 철수를 완료했다.
미국은 1947년 여름까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저지해 왔다.
美 군정은 李承晩과 金九를 제외한 左右합작운동을 주도했고, 과도입법 의원에도 이들을 배제했다는 데서 확인된다. 美군정은 1947년 4월에 李承晩의 정부수립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연금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심한 것은 제2차 美·蘇공동위원회가 남한 內 우익진영을 배제하자는 소련의 주장으로 결렬된 직후인 1947년 9월 이후이다.
한반도 분단을 기획하고 먼저 추진한 것은 소련이고 이에 동조한 金日成 정권이다.
[李承晩과 美 군정은 대립관계였다]
1953년 8월8일 韓美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댈러스 美 국무장관. 韓美상호방위조약은 李承晩의 안보외교의 승리였다.
리영희는 『李承晩은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자이며 미국의 지시에 따라 단독정부를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관계와 다르다.
이정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李承晩은 그의 철저한 反共노선 때문에 미국 정부의 주무부서인 국무부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비밀문서에 따르면 그 당시 美 국무부에는 소련의 첩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히스 특별정치국장과 빈센트 극동국장 등이었다. 이들은 李承晩에 非우호적이었다.
이들 관리들의 작용으로 인해 美 국무성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어 내려는 李承晩의 청원활동을 묵살했고, 在美동포사회에서 李承晩에 도전적이고 공산주 의자와 연계되어 있던 한길수와의 합작을 종용하고 그와 가까이하고 李承晩을 멀리했다.
광복 후 李承晩이 귀국하려고 할 때 美 국무성의 고의적인 지연으로 40일이 지난 후에야 홀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
李承晩은 1946년 6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美 군정은 오히려 李承晩을 강력히 비난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親日派 배제]
리영희는 『李承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활동한 한민당이 親日派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한민당에 親日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참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복 직후 親日派 숙청을 강하게 주장했던 좌익진영의 통일전선기구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民戰)은 親日派를 「일본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民戰의 親日派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 경력자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들 대부분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親日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日帝의 강요와 日帝말기 사회단체나 기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일제가 조직한 단체의 임원에 포함되었거나 親日的인 연설을 하고 글을 썼던 인사들이다.
좌익의 여운형 또한 상당한 親日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親日派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실제로 한민당에는 명백하게 「親日派」로 규정될 만한 인사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親日派를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세력은 5·10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親日 부역자들의 被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또한 李承晩은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 親日 경력자를 철저히 배제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관료기구와 경찰 및 군대조직에 일제下에서 관료와 경찰 및 장교를 지낸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건국의 주도세력은 아니었다.
레닌도 러시아혁명 직후 차르 치하의 관료를 그대로 썼다는 사실은 건국과정에 있어서 숙련된 행정가와 관료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韓美동맹은 李承晩 외교의 승리]
리영희는 韓美동맹을 들어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말했으나 미국은 애초에 韓美동맹을 맺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리영희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글에서 韓美상호방위조약이 미국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조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글의 제목에서는 이를 北進통일과 예속의 이중주라고 표현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1953년 3월 미국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정치적인 해결, 즉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다. 李承晩은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韓美방위조약의 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李承晩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1953년 6월18일 일방적으로 反共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미국은 독자적인 北進(북진)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非협조적인 李承晩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李承晩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군사방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1월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휴전의 성립과 李承晩이 주장했던 단독 北進 무력통일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에 李承晩은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그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가장 큰 밑받침이 됐다. 이 조약으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다.
[李承晩의 성공한 개혁들]
리영희는 李承晩과 집권 親日세력은 당시 민중들의 사회제도 개혁을 거부했고 해방정국 당시의 혼란은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으로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사실관계와 다른 주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대한민국 사회제도 개혁의 가장 큰 과제는 농지개혁이었다. 李承晩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고 그에 의해 이루어진 농지개혁은 북한이 단행한 농지개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6·25 전쟁 당시 「농지는 농민에게」라는 북한의 선전활동이 농민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李承晩의 개혁의지는 1948년 3월20일 친구이자 정치고문인 올리버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정부를 갖게 되면 우리는 이 나라를 엄청나게 자유화시킬 것입니다. 한국의 파시스트, 반동세력 그리고 극우파 운운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대경실색할 것이오. 농지개혁법이 가장 먼저 제정될 것이고, 다른 많은 자유주의적 조치들도 차례로 단행될 것입니다』
李承晩은 정부 수립 후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曺奉岩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 이유를 그는 평소 농지개혁을 역설해 온 曺奉岩을 통해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년 3~5월 사이에 적어도 70~80% 정도 농지 분배가 단행되었다.
李承晩은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대폭 증설해 광복 당시 75%였던 문맹률이었던 대한민국이 문자 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변모하는 데 기여했다.
李承晩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무렵 대한민국의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앞질렀다. 1950년대에 추진한 교육개혁 덕택에 1960년대 이후 朴正熙 시대의 「경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李承晩은 左翼도 인정한 민족지도자]
李承晩은 1919년 3·1 운동이 진행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의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3·1 운동 직후 발표된 국내와 해외의 8개 임시정부 중 6개 정부에서 李承晩을 집정관 총재 또는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있다.
日帝下에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李承晩의 해외독립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45년 9월 광복 직후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의해 주도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 각료명단에 李承晩은 대통령격인 주석에 추대되어 있다. 만일 리영희의 표현대로 李承晩이 분열주의자이고 해외활동이 형편 없었다면, 좌익이 주도한 정부 각료 명단에 그 이름이 올랐을 이유가 없다.
리영희의 주장에는 심각한 사실왜곡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上海임시정부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李承晩이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인 1905년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설립됐다.
[대한민국史는 성공한 역사]
대한민국은 기회주의 세력이 득세한 나라고 정의가 패배한 나라고 역사의 후퇴를 가져온 실패한 국가인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유례가 없는 성공의 역사이다. 全세계 제3세계 나라들에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라이다. 중국 근대화의 기수였던 鄧小平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朴正熙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화 방식은 근대화를 꿈꾸는 나라의 확실한 代案으로 인정되고 있다.
유엔개발기구에서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간 세계 174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을 조사한 통계자료가 있다. 그에 따르면 174개국의 36년간의 지표에서 한국이 평균 성장률 7.1%로 세계 1위이다.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10大 무역국이고,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지닌 자랑스러운 조국이다.
일부에서는 경제는 성장했으나 富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IMF 외환위기 직전까지 세계은행에서 조사한 富의 분배지수에서도 대한민국은 상위권에 올라 있다. 富의 분배가 잘되고 경제성장률이 높은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모델의 국가발전을 해온 나라이다. 대한민국은 조사된 나라 가운데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나라 중 상위권에 올라 있다.
반면 북한을 보자. 북한은 조사할 수 있는 각종 통계에서 세계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종교·거주이전, 심지어 직업의 자유도 없다. 지금 북한은 외부의 식량지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 있으며, 민족의 자존을 훼손하는 사례가 있단 말인가?
리영희와 左派는 더 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 된다. 거짓과 왜곡으로 진실의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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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끝내 진실을 외면했던 정직하지 못한 지식인 리영희에 대한 고발
[문화대혁명 50년] 그는 왜 중국을 가지 않았나
글 | 이동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2016-08-26 10:05
▲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이 홍위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천안문 광장 앞을 사열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과 책에서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와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가 각각 2위로 선정되었다고 경향신문이 2007년 보도했다. 2012년 12월 리영희 교수가 타계했을 때 좌파 언론을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은 ‘실천하는 지성’ ‘사상의 은사’로 고인을 추모했다. 백낙청은 조사에서 “고인이 살던 시절은 비록 험난했으나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고 이를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던 감격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마오쩌둥(毛澤東)을 위시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 나는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다. 공산당은 악(惡)이고, 이를 따르는 무리들은 상식적인 도를 넘어서는 비도덕적 인물일 것이라는 게 당시 내가 알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리영희의 책에서 본 마오쩌둥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를 지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자 영웅들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한 ‘인류 최초의 위대한 실험’이었다.
“나는 리영희 추종자 중 하나였다”
리영희와 만남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자본주의의 온갖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나라, 공산주의 나라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리영희의 안내에 따라 숭고한 이상을 향한 혁명적 실천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는 백낙청의 말대로 리영희를 따라나선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여 이의 실천에 나선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나의 청년 시절 공산주의자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동안 나의 사상과 이에 입각한 실천은 도전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구 공산권들의 연이은 붕괴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나라들은 내가 알던 이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토록 경멸했던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더욱 심한 인권 탄압과 부정과 독재로 일관된 최악의 나라들이었다. 그즈음 탈북자들의 증언이 언론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탈북자의 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실상은 더욱 충격이었다. 마지막 결정타는 황장엽씨의 탈북과 그의 증언이었다. 북한은 책에서 본 나라가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의 짓이라고 보기 어려운 참혹한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 탄압, 최악의 식량난, 민주주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최악의 1인 통치, 독재국가 그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겼던 믿음과 너무나 다른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즈음 다시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해 공부했다. 리영희의 안내는 거짓이었다. 그는 ‘실천하는 지성’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선전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우리에게 안내한 ‘잘못된 안내자’였다. 나의 젊은 시절을 온통 지배했던 혁명과 그를 위한 헌신과 실천은 통째로 부정당했다. 나는 잘못된 안내자를 따라 잘못된 길을 나선 ‘저능아’였다.
▲ ‘전환시대의 논리’와 ‘대화’
문화대혁명은 인류사상 초유의 실험?
리영희는 1974년 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에 수록된 ‘대륙중국에 대한 시각조정’에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과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리영희는 당시 쿠바특파원인 루이 암스트롱의 글과 한국외국어대 안경준씨의 글을 인용하여 ‘중국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사상 초유의 실험’, 즉 문화대혁명에 대해 두 가지 평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글에서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중국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리영희는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잘못 평가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에 따르면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인류 최초의 인간의식 개조 혁명이었다. 리영희는 이어 한 서방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 혁명은 못했다. 마오쩌둥은 공업화와 인간 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놓고 있다. 이어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이고 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의 평가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그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이상인 평등사회 실현을 위한 노력이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1977년 발행된 ‘우상과 이성’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국 현지의 평가는 당시 리영희가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마오쩌둥의 ‘인간성 개조’ 노력은 실패했고, 중국 인민들에게 거부당했다.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이 강압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한 인간적 방법으로 진행되어 스탈린의 무자비한 정적(政敵) 탄압이 아니라고 했던 리영희의 강변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정책 실패로 권좌에 물러난 후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순진한 젊은이들을 동원한 최악의 정적 숙청이었다. 나이 어린 ‘홍위병(紅衛兵)’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정적 제거와 권력 찬탈이 이루어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건물 2층에서 내던져졌다. 그는 평생을 불구자로 지내야 했다. 당시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는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광장에 끌려 나와 다중 앞에서 인간으로는 감내할 수 없는 수모와 폭력을 당해야 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사망했다.
▲ 리영희
“그는 ‘실패한 지식인’이었다”
미국의 중국 역사학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는 저서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에서 문화대혁명 당시의 사회상과 폭력성을 서술하고 있다. “‘우익분자’ ‘봉건잔재’ ‘뱀과 괴물’ ‘자본주의 노선을 주창한 당국자들’이라는 애매모호한 규정만으로 폭력이 자행되었다. 거리마다 마오 주석이 말한 유명한 어록이 게재되었고, 교차로와 공원마다 확성기가 설치되어 마오쩌둥의 사상을 방송했다. 각 가정은 물론이고 열차와 버스, 자전거와 택시에도 옆면에 마오쩌둥의 사진을 붙여야 했다. 열차와 버스의 검표원들도 마오쩌둥의 사상을 외워야 했다. 문화대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구가 되거나 평생토록 치유되지 못할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성이 상실된 광기의 집단폭력 현장이 문화대혁명이었다.
리영희는 2005년 발간된 ‘대화’에서 자신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찬한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내가 문화혁명의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에는 진실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더구나 남한 같은 극히 제한된 정보와 자료 속에서는 누구나 그랬지요.… 나 개인으로는 겹겹이 제한된 상태에서 관찰할 수밖에 없었어요. 도대체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필요하며, 그것이 운동의 발전법칙상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가 하는 점을 완전히 파악하기조차 정말 어려웠으니까.”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전모를 다 알지도 못했으면서도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인류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강변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가 문화대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필요한지 등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말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는 이전 그의 글에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스탈린의 물질제일주의를 넘어서는 인간 개조 혁명이며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다고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던가. 양동안 선생은 “지식인이란 정확히 알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라고 지식인을 설명하고 있다. 리영희는 잘 몰랐던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던 ‘실패한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 문화대혁명 당시 자아비판에 끌려나온 사람들. ‘고집 센 주자파’ ‘대반역자’라는 문구가 보인다. photo 뉴시스
“그는 끝내 진실을 외면했다”
리영희는 중국이 개방되고도 한 번도 중국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변명대로 1970년대 당국의 탄압 때문에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면 1990년대 민주화된 정부 아래 마음만 먹었다면, 중국을 방문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얼마든지 관계자, 학자, 젊은이들을 만나 당시의 상황과 전모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과 마주하는 정직한 태도가 지식인의 필수 덕목이다. 사실이 그에게 불리하고,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정직히 마주해야 한다. 리영희는 중국을 방문하여 자신이 주장했던 인류 최초의 인간 개조 혁명의 현장을 직접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다시 내려야만 했다. 그것이 정직한 지식인의 태도다.
리영희가 왜 중국을 방문하여 문화대혁명을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의 단초는 그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오쩌둥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실천적 행동양식에 공감했다고 리영희는 말하고 있다. 마오쩌둥 사상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것이다. 추종자에게 비판적 성찰은 없다. 리영희의 활동 목적은 지식인의 성찰적 활동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중을 향해 공산주의를 선전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리영희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전모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리영희는 공산주의에 대한 추종을 거두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회와 혁명가 마오쩌둥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지지가 그를 사실과 멀어지게 했던 것이다. 소련이 멸망하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가는 세기적 사건 앞에 그는 여전히 공산혁명가를 자처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혁명을 못내 아쉬워했다.
리영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옳았다. 그의 변명대로 잘못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가 밝혀진 다음 그가 보여준 변명과 태도는 올바른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잘못된 자신의 글로 인해 평생을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한 후학(後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된 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리영희 비판 2005년 9월|작성자 youseok0
리영희 비판 2005년 9월 낙서장
2020. 4. 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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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5년 9월
한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리영희와 左派는 더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된다
이동복
毛澤東과 문화혁명 일방 美化
反美·대한민국 현대사 왜곡
386을 사상적 혼돈으로 인도
리영희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實在가 아니라 선전 문구였다.
레닌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쓸모 있는 바보」였다. 사실과 선전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저주했던 어리석은 남자였다. 그것이 오늘 나의 눈에 비친 리영희의 모습이다.
李東湖 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現 북한민주화 포럼 간사
1959년 울산 출생. 연세大 신학과 졸업. 全大協 연대사업국장 겸 서총련 연대사업국장, 전민련 결성준비委 학생대표 역임. 북한민주화포럼 간사.
내 인생을 바꾼 리영희와의 만남
리영희 교수의 글을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후반이었다. 나는 朴正熙 대통령의 유신통치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20代 초반의 청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반공교육」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기성권위에 대한 도전과 문제의식이 주된 이유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너무 짧았고, 사상을 얘기할 만큼 내 공부가 깊지도 않았다. 다만 「공산주의는 惡이고, 자본주의는 善이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주장에 식상해 있었다.
그런 내게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은 충격이었다. 李承晩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日帝의 앞잡이였고, 日帝에 저항하였던 세력은 우리가 빨갱이라고 저주했던 左派(좌파)라고 주장했다.
식민지 해방운동의 주역은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을 건설한 金日成 세력이었고, 내가 대한민국의 은인이라고 여겼던 미국은 흉악한 음모를 지닌 대한민국 건국의 배후 조종자였다. 대한민국은 자주 독립국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은 다 허물어졌다. 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알고 있었던 知的(지적) 저능아였다.
리영희의 책에서 알게 된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를 지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자 영웅들이었다.
나와 리영희의 만남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나의 스승 리영희는 내 인생의 좌표였고 길잡이였다. 그는 나의 삶의 행로를 바꾸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사생아 대한민국을 지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회혁명이 필요해 보였다. 공산주의 사상만이 유일한 代案이었고, 다른 사상들은 인간을 교묘하게 속이는 위선의 허접스러운 사상이었다. 나의 사회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청년 시절 나의 이런 신념은 한 번도 도전당하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붕괴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이은 붕괴는 내게 리영희와의 만남만큼 충격이었다. 탈북자들과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참혹한 실상은 사회주의와 주체의 나라 북한에 대한 동경을 깨부셨다.
공산주의 나라에는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가 없었고, 자본주의 나라보다 더한 독재와 관료주의, 인간에 대한 지독한 소외만이 있었을 뿐이다.
내 청년기의 사상과 행동은 정당성을 상실했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全斗煥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진지한 성찰 없이 사회주의를 택했던 나의 非지성적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나를 사회주의로 이끌었던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을 다시 한 번 정독했다.
한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개인으로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진지하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다.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편에서는 좌경 의식화의 원조로, 다른 한편에서는 386의 「사상적 恩師」로 불린다.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 인물이다. 그가 386에 끼쳤던 영향을 감안하면 그런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외할아버지를 죽인 머슴을 憧憬
1989년 한겨레신문 入北 취재계획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리영희 당시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리영희는 지난 3월에 발간된 「대화」라는 책에서 소년 시절 社會主義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외삼촌 최모린을 존경했다고 밝혔다. 그 다음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巨富였던 외조부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사라진 뒤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세 번에 걸쳐 외조부의 재산을 털고 끝내 외조부를 총으로 죽인 머슴 문학빈(그후 일본군에 협조한 것으로 밝혀짐)을 憧憬(동경)하며 성장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미군 통역관으로서의 軍생활과 외신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軍의 불합리와 부패, 그리고 당시 기자 사회에서 나타난 부조리와 연줄관계에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리영희는 「그 代案으로서 중국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중국 毛澤東(모택동)의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1965년에 일어났던 文化革命(문화혁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의 사상적 기조를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그후 일관되게 親北 논조를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는 동경하는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다.
毛澤東과 文革에 대한 동경
毛澤東 어록집을 들고 환호하는 홍위병들. 리영희는 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일방적으로 합리화했다.
리영희는 毛澤東의 공산혁명과 문화혁명을 동경하고 미화했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그의 저서에 나타나는 일관적인 특징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조롱, 철저한 反美의식, 대한민국에 대한 자학적 역사인식이다.
리영희는 1974년 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에 수록된 「대륙중국에 대한 시각조정」에서 毛澤東과 문화혁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리영희는 쿠바 특파원인 루이 암스트롱의 글과 한국외국어大의 안경준씨의 글을 인용한다.
『새로운 大약진이 마련되고 있다. 집단경제는 모든 시련을 넘어 인민공사는 반석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모든 기적을 나에게 보여 준 이 나라 인민에게 축복이 있어라』(루이 암스트롱)
『(인민공사에 대한) 인민의 뿌리깊은 개인경영사상과 집단수용소에 대해 느끼는 환멸감은 자본주의적 요소가 끊임없이 성장되도록 부채질할 것이며 공산독재의 멸망을 촉진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안경준)
여기서 리영희는 「문화혁명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중국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라며, 부정적 평가는 잘못된 선입관이 개입됐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것과, 계급분화의 제 조건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인간사회를 보장·발전시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자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닌 운동』이라고 본다.
리영희는 毛澤東이 문화혁명을 일으키게 된 배경이 첫째, 중국공산혁명을 일으키던 당시와 혁명이 성공하고 난 후 사이에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이 상이함에 따른 새로운 모순과 갈등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毛澤東이 게릴라 활동을 하던 당시의 인간형_리영희 표현에 따르면 철저한 평등·우애·동지애·자기희생·전체에의 봉사 그리고 극단적인 절약 등으로 상징되는 인간형-과 권력을 장악한 뒤에 보이는 현실적 인간형 사이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리영희는 이를 『스탈린식의 「물질제일주의」와 毛澤東식의 「인간제일주의」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 사회주의의 특징은 생산수단의 사회화, 즉 국유화가 이루어지면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로 나뉘어진 모든 계급은 소멸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토대 위에 생산력은 급속히 발전되고, 인간의 의식 또한 변화된다고 보았다.
중국 공산당의 주장을 無비판 수용
리영희는 『이러한 태도는 물질 변화에만 주목한 물질중심주의적 태도』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스탈린과 毛澤東은 대립된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생산력이 발전하거나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회주의가 이루어져도 舊시대적 의식_자본주의적 또는 前근대 봉건적인 의식, 다시 말해 이기적 욕심_은 남아 있어서 사회주의의 완성을 끝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毛澤東은 「사회혁명과 별도의 인간의식 개조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영희의 입장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공식 견해를 無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리영희에 따르면 『劉少奇(유소기)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생산력이 발전되면 인간의 사상개조가 이루어진다는 관점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劉少奇는 中共이 급속한 공업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긴박성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욕구에 호소하는 물질적 자극책을 썼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농촌에서는 사유지의 보장과 생산결과에 따른 생산이윤의 보장 등이고, 공업 분야에서는 전문가와 기술자의 우대, 노동자들의 이들에 대한 종속, 관리인 중심의 경영제도, 41종에 달하는 보너스제 도입 등 현재 소련식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毛澤東이 보기에는 단기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는 효과는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을 조장함으로써 자본주의에로의 역행현상이 일어나 중국 사회주의혁명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는 것이다.
毛澤東 개인 숭배 옹호
리영희는 毛澤東과 劉少奇의 권력투쟁을 노선투쟁으로 미화했다.
이어서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毛澤東을 극찬하고 있다. 그는 한 서방의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 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혁명은 못 했다. 毛澤東은 공업화와 인간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 놓았다.
리영희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문화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全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인간의 평등사회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고 했다. 그 노선의 실현이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는 1977년 발간된 「우상과 이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下放(하방: 지식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노동을 시키는 운동)」을 「인간우선주의」의 실천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화혁명의 과정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그 예로 『가장 극심한 비판을 받았던 劉少奇도 北京 교외에서 현재 再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리영희의 毛澤東 숭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毛澤東은 인간적으로 그릇이 매우 큰 영웅의 풍모를 지녔고 동시에 사상가·교육가·정치가·전략가·詩人 등 다양한 자질을 한몸에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리영희는 더 나아가 『毛澤東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리영희는 毛澤東의 「개인숭배」에 대해서도 색다른 분석을 했다. 아마 송두율式의 「내재적 접근법」의 원조가 아닌가 한다.
『개인숭배를 중국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된다. 외부의 시각으로 중국 인민들의 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중국처럼 장구한 세월 동안 정치적 억압과 빈곤과 비참의 역사를 살아 온 중국민중에게는 그 생물학적·인간적 존재의 기본조건을 처음으로 해결해준 지도자와 그 인간에 대한 감정은 숭배에 가까운 「거의 절대적인 존경」이 있을 수 있다』
또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毛澤東의 개인숭배는 차이가 있다고 강변한다.
『스탈린은 당과 정부로 구성되는 관료화된 권력체계의 커다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관료적 방법으로 숭배를 강요했다. 반면 毛澤東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휘한 당 관료기구를 타파함으로써 민중과 자기를 직결시키는 데 대한 존경이다. 홍위병 운동은 인민대중의 지성과 에너지에 의거한 결정과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운동이라는 것이다. 毛澤東의 이러한 대중의 힘에 의거하는 방식이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방식과의 가장 큰 차이다』
뿌리 깊은 反美, 대한민국에 대한 경멸
리영희는 자본주의를 경멸한다. 그 代案으로 그는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毛澤東의 사상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나라를 대표하는 미국은 증오한다.
리영희는 미국은 전쟁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구조를 지닌 나라이며 全세계에 걸쳐 제국주의적 침략을 일삼는 나라로 보았다. 「대화」라는 최근의 책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밝혔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정치·군사·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리영희의 미국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심각한 빈부격차, 경제·사회의 부정부패, 인종차별, 기업의 냉혈적 인사제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몰인정적인 생존경쟁 등 인간관계의 냉혹한 단면을 지닌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철저한 이기주의적 자본주의 나라이다. 북한 核문제의 본질도 미국의 전쟁 없이 살 수 없는 제국주의적 침략적 속성에서 찾아야 한다』
리영희는 1994년 출간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평화의 가면 아래 지구상의 도처에 불씨를 뿌리고 다니는 국가가 있다. 진정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 없는 삶을 원하는 사람은 그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리영희에 따르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상 최악의 나라다. 과연 그런가? 역사는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사회주의 나라가 그의 분석과 달리 최악의 나라였음을 보여 준다.
심각한 관료주의의 폐해와 부패는 자본주의 나라보다 훨씬 심각했고, 인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공산독재자들의 철권통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실제적인 삶은 지상낙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지상낙원이라던 사회주의 나라의 인민들은 그들 스스로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리영희가 그토록 혐오했던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을 선택했다. 사회주의 나라들은 전쟁이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그는 허상을 보았고, 지금도 그 허상을 좇고 있다. 그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實在(실재)가 아니라 선전 문구를 사실로 착각한 것이다. 레닌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쓸모 있는 바보」였다. 사실과 선전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저주했던 어리석은 모습이 오늘 나의 눈에 비친 리영희의 모습이다.
대한민국史는 親日·독재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
리영희는 1945년 이래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美 제국주의의 남한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와 이에 결탁한 李承晩과 朴正熙를 비롯한 독재정권과 그들의 계급적 기반인 親日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반면 그는 얼마 전 발간된 「대화」에서 북한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애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된 나라이며, 새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親日派를 비롯한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된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대한민국觀은 「우상과 이성」에 잘 나타나 있다.
『남을 안방에 모셔 놓고 주인처럼 섬기기 20여 년, 해방 후부터 치면 32년인데, 그만하면 됐지 얼마나 더 모셔야 종의 근성이 풀린다는 말일까. 이런 정신적인 기형아, 생태적 불구를 만드는 데는 이 나라에 대해서 주인행세를 해 온 그쪽의 잘못도 있다. 사실 그 잘못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중하다』
리영희가 본 8·15 광복 당시의 남한은 지배자인 미국과 이에 결탁한 세력들에 지배된 무법천지의 사회였다.
『과거에 남한에 잔존해 있던 악질적인 반역자들과 親日派들이 북한에서 도피해온 같은 부류의 악질분자와 결탁하여 남한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美 군정의 비호 아래 도처에서 온갖 테러와 불법행위 폭력을 자행했다. 거기에서 남한 민중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당시의 無정부 상태의 원인은 한마디로 美 군정과 이들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조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리영희의 당시 해방정국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남한을 사회주의 나라로 만들려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폭동이 실체적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의도적으로 빠뜨리고 있다.
리영희에 따르면, 분단의 책임도 미국에 있다. 38선을 그은 것도 미국이다.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
「대화」에 나와 있는 광복 이후의 역사에 대한 그의 평을 보자.
『1945년에서부터 1948년까지 미국 군대에 의한 점령통치기구인 군사정권下에 놓였지요. 일본 총독통치의 변형이었지. 1948년에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李承晩이 남북 통일국가 수립을 거부하고, 국토분단을 전제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한 것도 李承晩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이 있었지요』
리영희는 李承晩을 미국의 앞잡이로 보았다. 「대화」에서 그는 李承晩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李承晩의 애국심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야심 충족, 즉 권력 획득의 한 방편이다. 李承晩은 타협이나 관용을 모르는 전제주의 제왕형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장한 과정과 정치인으로서의 행적을 볼 때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왕조체제 같은 한국을 상상했다』
그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李承晩을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李承晩은 민족의 통합보다 분열을 중시하고, 남북의 화합을 극렬히 반대하고, 자기의 패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李承晩은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서 上海임시정부나 그 밖의 해외 독립운동에서 분파주의, 패권주의자로 지탄을 받았던 사람이다. 임시정부에서도 총통을 주지 않으면 반드시 이탈하고 깽판치고 했던 그런 위인이다. 그래서 그는 임정생활을 다하지 못하고 절교가 되어 미국에 들어가 프린스턴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다』
리영희의 분석에 의하면, 「李承晩은 철저한 미국 숭배주의자로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물론 초보적인 사회개혁도 적대시 했다」고 한다.
그는 「자유인, 자유인」에서 광복 이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광복 직후와 대한민국 수립으로 시작되는 민족 광복의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날뛰는 反민족주의자들과 反통일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李承晩이라는 反민족 광신주의자의 정치적 욕망이 충족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이 민족의 분단은 굳어졌고 이 사회의 민주주의 실현의 염원은 멀어져 갔던 것이다』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리영희의 북한관은 따져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金日成 체제의 인권탄압과 경제난이 불거져 나오던 1994년에 발간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리영희는 북한에게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남쪽 사회는 외세의존과 상당한 국가주권을 양도한 代價로 얻어진 것이다.
북쪽은 반대의 철학으로 나라 만들기를 서두른 결과 높은 민족적 자존과 사회구성원 상호 간의 도덕적 생존양식, 그리고 동포애가 감도는 순박한 인간형 등의 사회를 실현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공평한 관측자, 방문객들에 의해서 그 측면의 사회적 善이 확인되었다』
1994년 전쟁 위기로 치닫던 북한 核문제에서도 그는 북한의 편에 섰다.
北核은 미국 책임
그는 1991년 7월 북한이 원자력기구와 개별협상에 가서명한 것을 환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가시지 않고 있는데 이는 북한 核보다는 더욱 위험스러운 미국이라는 원인이 있다』고 했다. 소위 「북한 核」의 원인과 책임은 북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미국도 같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核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미국의 위협 앞에 공포감을 지닌 북한의 이유 있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盧武鉉 대통령이 『북한의 核보유는 일리가 있다』고 한 발언은 리영희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盧武鉉은 「정신적인 386」의 한 멤버이기 때문이다.
리영희의 잘못된 예언과 역사인식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은 「10년 동란」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을 毛澤東식 「인간제일주의」의 소산으로 보았다. 사진은 홍위병들이 반동으로 몰린 시민을 핍박하는 모습.
리영희가 극찬했던 인류사상 최초의 거대한 「인간개조 실험」인 문화혁명은 실패했다. 애초부터 잘못된 가정에 입각한 오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문화혁명에 대한 평가는 당시 리영희가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홍위병들의 폭력에 의한 철저한 인간성 파괴와 문화파괴가 만연했고, 사회적 생산력의 저하에 따라 중국 인민은 고통을 겪었다. 중국 인민들은 이제 문화혁명을 「10년 동란」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 역사학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는 「무질서의 지배자 毛澤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사회상과 폭력성을 기술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구가 되거나 평생토록 치유되지 못할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문화혁명에 대한 자신의 오류를 변명했다.
이를 요약하면 「당시 나는 문화혁명의 전모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식인으로서는 도무지 취할 수 없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다.
전모를 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인류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떠들었다는 말인가? 당시 그의 선전에 경도되어 잘못된 사상과 인식으로 자신의 젊음을 소모한 사람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것 아닌가?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혁명을 남한 사회의 독자들에게 전할 때, 『자본주의 사회의 병든 생활방식과 존재양식에 대해서 대조적인 삶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鄧小平은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본주의 방식의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했다. 리영희 자신이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야 말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류가 발견한 최선의 제도라는 사실은 입증됐다.
[리영희의 비뚤어진 대한민국觀]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李承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①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며, 미국은 남한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②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다. 李承晩의 남한 정부수립 운동은 민족분단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美 군정은 처음부터 李承晩의 남한 정부수립 운동을 지원했다.
③ 대한민국은 미국의 앞잡이들과 親日派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④ 韓美동맹은 미국에 대한 예속의 결정판이다.
⑤ 李承晩 정권은 사회제도 개혁을 거부했다.
⑥ 李承晩은 上海임시정부와 해외독립운동에서 비난받았던 분파주의자다.
소련 붕괴 이후 각종 기밀문서가 알려지면서 위의 주장들은 근거가 희박하거나, 일방적인 주장임이 드러나고 있다.
리영희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미국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無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또한 북한의 「反帝·反봉건 민주주의혁명론」의 이론구조와 유사하다.
[군사분계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킨 것은 소련]
38선을 넘어 월남하는 일가족. 38선은 소련에 의해 정치분계선으로 변질되기 전에는 엄격한 정치적 분계선은 아니었다.
미국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보는 견해는 그 주장의 근거로 미국이 38선을 획정했으며, 미국이 남한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한다.
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美·英·佛·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비밀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월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년 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지역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이는 미국합동참모본부가 1947년 9월22일에 작성한 평가서에 나타나 있다. 미국은 1948년 남한에 통일정부 구성이 불가능해지자 서둘러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고 주둔미군을 조속히 철수하고자 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9월15일부터 駐韓美軍 철수를 비밀리에 개시하여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을 남기고 철수를 완료했다.
미국은 1947년 여름까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저지해 왔다.
美 군정은 李承晩과 金九를 제외한 左右합작운동을 주도했고, 과도입법 의원에도 이들을 배제했다는 데서 확인된다. 美군정은 1947년 4월에 李承晩의 정부수립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연금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심한 것은 제2차 美·蘇공동위원회가 남한 內 우익진영을 배제하자는 소련의 주장으로 결렬된 직후인 1947년 9월 이후이다.
한반도 분단을 기획하고 먼저 추진한 것은 소련이고 이에 동조한 金日成 정권이다.
[李承晩과 美 군정은 대립관계였다]
1953년 8월8일 韓美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댈러스 美 국무장관. 韓美상호방위조약은 李承晩의 안보외교의 승리였다.
리영희는 『李承晩은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자이며 미국의 지시에 따라 단독정부를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관계와 다르다.
이정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李承晩은 그의 철저한 反共노선 때문에 미국 정부의 주무부서인 국무부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비밀문서에 따르면 그 당시 美 국무부에는 소련의 첩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히스 특별정치국장과 빈센트 극동국장 등이었다. 이들은 李承晩에 非우호적이었다.
이들 관리들의 작용으로 인해 美 국무성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어 내려는 李承晩의 청원활동을 묵살했고, 在美동포사회에서 李承晩에 도전적이고 공산주 의자와 연계되어 있던 한길수와의 합작을 종용하고 그와 가까이하고 李承晩을 멀리했다.
광복 후 李承晩이 귀국하려고 할 때 美 국무성의 고의적인 지연으로 40일이 지난 후에야 홀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
李承晩은 1946년 6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美 군정은 오히려 李承晩을 강력히 비난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親日派 배제]
리영희는 『李承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활동한 한민당이 親日派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한민당에 親日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참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복 직후 親日派 숙청을 강하게 주장했던 좌익진영의 통일전선기구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民戰)은 親日派를 「일본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民戰의 親日派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 경력자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들 대부분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親日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日帝의 강요와 日帝말기 사회단체나 기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일제가 조직한 단체의 임원에 포함되었거나 親日的인 연설을 하고 글을 썼던 인사들이다.
좌익의 여운형 또한 상당한 親日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親日派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실제로 한민당에는 명백하게 「親日派」로 규정될 만한 인사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親日派를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세력은 5·10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親日 부역자들의 被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또한 李承晩은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 親日 경력자를 철저히 배제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관료기구와 경찰 및 군대조직에 일제下에서 관료와 경찰 및 장교를 지낸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건국의 주도세력은 아니었다.
레닌도 러시아혁명 직후 차르 치하의 관료를 그대로 썼다는 사실은 건국과정에 있어서 숙련된 행정가와 관료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韓美동맹은 李承晩 외교의 승리]
리영희는 韓美동맹을 들어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말했으나 미국은 애초에 韓美동맹을 맺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리영희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글에서 韓美상호방위조약이 미국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조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글의 제목에서는 이를 北進통일과 예속의 이중주라고 표현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1953년 3월 미국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정치적인 해결, 즉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다. 李承晩은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韓美방위조약의 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李承晩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1953년 6월18일 일방적으로 反共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미국은 독자적인 北進(북진)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非협조적인 李承晩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李承晩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군사방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1월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휴전의 성립과 李承晩이 주장했던 단독 北進 무력통일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에 李承晩은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그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가장 큰 밑받침이 됐다. 이 조약으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다.
[李承晩의 성공한 개혁들]
리영희는 李承晩과 집권 親日세력은 당시 민중들의 사회제도 개혁을 거부했고 해방정국 당시의 혼란은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으로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사실관계와 다른 주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대한민국 사회제도 개혁의 가장 큰 과제는 농지개혁이었다. 李承晩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고 그에 의해 이루어진 농지개혁은 북한이 단행한 농지개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6·25 전쟁 당시 「농지는 농민에게」라는 북한의 선전활동이 농민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李承晩의 개혁의지는 1948년 3월20일 친구이자 정치고문인 올리버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정부를 갖게 되면 우리는 이 나라를 엄청나게 자유화시킬 것입니다. 한국의 파시스트, 반동세력 그리고 극우파 운운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대경실색할 것이오. 농지개혁법이 가장 먼저 제정될 것이고, 다른 많은 자유주의적 조치들도 차례로 단행될 것입니다』
李承晩은 정부 수립 후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曺奉岩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 이유를 그는 평소 농지개혁을 역설해 온 曺奉岩을 통해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년 3~5월 사이에 적어도 70~80% 정도 농지 분배가 단행되었다.
李承晩은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대폭 증설해 광복 당시 75%였던 문맹률이었던 대한민국이 문자 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변모하는 데 기여했다.
李承晩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무렵 대한민국의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앞질렀다. 1950년대에 추진한 교육개혁 덕택에 1960년대 이후 朴正熙 시대의 「경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李承晩은 左翼도 인정한 민족지도자]
李承晩은 1919년 3·1 운동이 진행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의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3·1 운동 직후 발표된 국내와 해외의 8개 임시정부 중 6개 정부에서 李承晩을 집정관 총재 또는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있다.
日帝下에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李承晩의 해외독립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45년 9월 광복 직후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의해 주도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 각료명단에 李承晩은 대통령격인 주석에 추대되어 있다. 만일 리영희의 표현대로 李承晩이 분열주의자이고 해외활동이 형편 없었다면, 좌익이 주도한 정부 각료 명단에 그 이름이 올랐을 이유가 없다.
리영희의 주장에는 심각한 사실왜곡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上海임시정부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李承晩이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인 1905년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설립됐다.
[대한민국史는 성공한 역사]
대한민국은 기회주의 세력이 득세한 나라고 정의가 패배한 나라고 역사의 후퇴를 가져온 실패한 국가인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유례가 없는 성공의 역사이다. 全세계 제3세계 나라들에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라이다. 중국 근대화의 기수였던 鄧小平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朴正熙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화 방식은 근대화를 꿈꾸는 나라의 확실한 代案으로 인정되고 있다.
유엔개발기구에서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간 세계 174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을 조사한 통계자료가 있다. 그에 따르면 174개국의 36년간의 지표에서 한국이 평균 성장률 7.1%로 세계 1위이다.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10大 무역국이고,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지닌 자랑스러운 조국이다.
일부에서는 경제는 성장했으나 富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IMF 외환위기 직전까지 세계은행에서 조사한 富의 분배지수에서도 대한민국은 상위권에 올라 있다. 富의 분배가 잘되고 경제성장률이 높은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모델의 국가발전을 해온 나라이다. 대한민국은 조사된 나라 가운데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나라 중 상위권에 올라 있다.
반면 북한을 보자. 북한은 조사할 수 있는 각종 통계에서 세계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종교·거주이전, 심지어 직업의 자유도 없다. 지금 북한은 외부의 식량지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 있으며, 민족의 자존을 훼손하는 사례가 있단 말인가?
리영희와 左派는 더 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 된다. 거짓과 왜곡으로 진실의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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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끝내 진실을 외면했던 정직하지 못한 지식인 리영희에 대한 고발
[문화대혁명 50년] 그는 왜 중국을 가지 않았나
글 | 이동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2016-08-26 10:05
▲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이 홍위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천안문 광장 앞을 사열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과 책에서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와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가 각각 2위로 선정되었다고 경향신문이 2007년 보도했다. 2012년 12월 리영희 교수가 타계했을 때 좌파 언론을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은 ‘실천하는 지성’ ‘사상의 은사’로 고인을 추모했다. 백낙청은 조사에서 “고인이 살던 시절은 비록 험난했으나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고 이를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던 감격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마오쩌둥(毛澤東)을 위시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 나는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다. 공산당은 악(惡)이고, 이를 따르는 무리들은 상식적인 도를 넘어서는 비도덕적 인물일 것이라는 게 당시 내가 알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리영희의 책에서 본 마오쩌둥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를 지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자 영웅들이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한 ‘인류 최초의 위대한 실험’이었다.
“나는 리영희 추종자 중 하나였다”
리영희와 만남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자본주의의 온갖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나라, 공산주의 나라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리영희의 안내에 따라 숭고한 이상을 향한 혁명적 실천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는 백낙청의 말대로 리영희를 따라나선 ‘진실에 열렬히 호응하여 이의 실천에 나선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나의 청년 시절 공산주의자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동안 나의 사상과 이에 입각한 실천은 도전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구 공산권들의 연이은 붕괴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나라들은 내가 알던 이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토록 경멸했던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더욱 심한 인권 탄압과 부정과 독재로 일관된 최악의 나라들이었다. 그즈음 탈북자들의 증언이 언론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탈북자의 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실상은 더욱 충격이었다. 마지막 결정타는 황장엽씨의 탈북과 그의 증언이었다. 북한은 책에서 본 나라가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의 짓이라고 보기 어려운 참혹한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 탄압, 최악의 식량난, 민주주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최악의 1인 통치, 독재국가 그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겼던 믿음과 너무나 다른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즈음 다시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해 공부했다. 리영희의 안내는 거짓이었다. 그는 ‘실천하는 지성’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선전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우리에게 안내한 ‘잘못된 안내자’였다. 나의 젊은 시절을 온통 지배했던 혁명과 그를 위한 헌신과 실천은 통째로 부정당했다. 나는 잘못된 안내자를 따라 잘못된 길을 나선 ‘저능아’였다.
▲ ‘전환시대의 논리’와 ‘대화’
문화대혁명은 인류사상 초유의 실험?
리영희는 1974년 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에 수록된 ‘대륙중국에 대한 시각조정’에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과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리영희는 당시 쿠바특파원인 루이 암스트롱의 글과 한국외국어대 안경준씨의 글을 인용하여 ‘중국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사상 초유의 실험’, 즉 문화대혁명에 대해 두 가지 평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글에서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중국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리영희는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잘못 평가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에 따르면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인류 최초의 인간의식 개조 혁명이었다. 리영희는 이어 한 서방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 혁명은 못했다. 마오쩌둥은 공업화와 인간 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놓고 있다. 이어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이고 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의 평가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그의 문화대혁명은 인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이상인 평등사회 실현을 위한 노력이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어 1977년 발행된 ‘우상과 이성’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국 현지의 평가는 당시 리영희가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마오쩌둥의 ‘인간성 개조’ 노력은 실패했고, 중국 인민들에게 거부당했다.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이 강압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한 인간적 방법으로 진행되어 스탈린의 무자비한 정적(政敵) 탄압이 아니라고 했던 리영희의 강변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정책 실패로 권좌에 물러난 후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순진한 젊은이들을 동원한 최악의 정적 숙청이었다. 나이 어린 ‘홍위병(紅衛兵)’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정적 제거와 권력 찬탈이 이루어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건물 2층에서 내던져졌다. 그는 평생을 불구자로 지내야 했다. 당시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는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광장에 끌려 나와 다중 앞에서 인간으로는 감내할 수 없는 수모와 폭력을 당해야 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사망했다.
▲ 리영희
“그는 ‘실패한 지식인’이었다”
미국의 중국 역사학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는 저서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에서 문화대혁명 당시의 사회상과 폭력성을 서술하고 있다. “‘우익분자’ ‘봉건잔재’ ‘뱀과 괴물’ ‘자본주의 노선을 주창한 당국자들’이라는 애매모호한 규정만으로 폭력이 자행되었다. 거리마다 마오 주석이 말한 유명한 어록이 게재되었고, 교차로와 공원마다 확성기가 설치되어 마오쩌둥의 사상을 방송했다. 각 가정은 물론이고 열차와 버스, 자전거와 택시에도 옆면에 마오쩌둥의 사진을 붙여야 했다. 열차와 버스의 검표원들도 마오쩌둥의 사상을 외워야 했다. 문화대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구가 되거나 평생토록 치유되지 못할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성이 상실된 광기의 집단폭력 현장이 문화대혁명이었다.
리영희는 2005년 발간된 ‘대화’에서 자신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찬한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내가 문화혁명의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에는 진실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더구나 남한 같은 극히 제한된 정보와 자료 속에서는 누구나 그랬지요.… 나 개인으로는 겹겹이 제한된 상태에서 관찰할 수밖에 없었어요. 도대체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필요하며, 그것이 운동의 발전법칙상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가 하는 점을 완전히 파악하기조차 정말 어려웠으니까.”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전모를 다 알지도 못했으면서도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인류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강변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가 문화대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필요한지 등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말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는 이전 그의 글에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스탈린의 물질제일주의를 넘어서는 인간 개조 혁명이며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다고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던가. 양동안 선생은 “지식인이란 정확히 알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라고 지식인을 설명하고 있다. 리영희는 잘 몰랐던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던 ‘실패한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 문화대혁명 당시 자아비판에 끌려나온 사람들. ‘고집 센 주자파’ ‘대반역자’라는 문구가 보인다. photo 뉴시스
“그는 끝내 진실을 외면했다”
리영희는 중국이 개방되고도 한 번도 중국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변명대로 1970년대 당국의 탄압 때문에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면 1990년대 민주화된 정부 아래 마음만 먹었다면, 중국을 방문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얼마든지 관계자, 학자, 젊은이들을 만나 당시의 상황과 전모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과 마주하는 정직한 태도가 지식인의 필수 덕목이다. 사실이 그에게 불리하고,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정직히 마주해야 한다. 리영희는 중국을 방문하여 자신이 주장했던 인류 최초의 인간 개조 혁명의 현장을 직접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다시 내려야만 했다. 그것이 정직한 지식인의 태도다.
리영희가 왜 중국을 방문하여 문화대혁명을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의 단초는 그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오쩌둥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실천적 행동양식에 공감했다고 리영희는 말하고 있다. 마오쩌둥 사상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것이다. 추종자에게 비판적 성찰은 없다. 리영희의 활동 목적은 지식인의 성찰적 활동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중을 향해 공산주의를 선전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리영희는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전모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리영희는 공산주의에 대한 추종을 거두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회와 혁명가 마오쩌둥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지지가 그를 사실과 멀어지게 했던 것이다. 소련이 멸망하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가는 세기적 사건 앞에 그는 여전히 공산혁명가를 자처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혁명을 못내 아쉬워했다.
리영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옳았다. 그의 변명대로 잘못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가 밝혀진 다음 그가 보여준 변명과 태도는 올바른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잘못된 자신의 글로 인해 평생을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한 후학(後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된 글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리영희 비판 2005년 9월|작성자 youseo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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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11-2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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