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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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현충원 안장 문제와 관련해 야권 일각에서 ‘친일 단죄론’과 ‘파묘(破墓·무덤을 파냄)론’이 잇따라 나오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원희룡 국토부장관은 “백 장군은 ‘6·25의 이순신’이라고 평가해도 될 것”이라고 했지만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당선자는 28일 “백 장군의 책에 친일 행적을 고백하는 내용이 있다”며 현충원 안장에 반대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백 장군의 6·25전쟁 전공(戰功)은 재론의 여지 없이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재향군인회는 지난 27일 발표한 성명에서 “백 장군은 창군 멤버로서 6·25 전쟁 시 최악의 전투로 알려진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며,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평양 탈환 작전을 성공시켰다”며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공인한 전쟁 영웅”이라고 했다.
◇31세 최연소 참모총장, 한국군 최초의 대장 기록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을 때 그가 사단장으로 지휘하던 육군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 유일하게 미군 1군단에 배속됐다. 지원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에서 6.25전쟁 중 대표적인 격전이었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겁에 질린 우리 군 병력이 뒤로 후퇴하고 무단 이탈도 생겼다. 그러자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고 다급히 전황을 알려왔다.
백 장군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백 장군의 고군분투에 힘입어 한미 양국군은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다부동에서 패했다면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고, 남한이 적화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백 장군이 이끈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 1기병사단, 24보병사단 등과 치열한 북진 경쟁을 벌였다.
백 장군의 부대가 결국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평북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후퇴했다.
전쟁 중 1사단은 미군들로부터 “가장 잘 싸운 한국군 부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전쟁 중에도 국군과 경찰 유자녀, 전쟁 중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백선 유아원’을 설립했다.
1951년11월엔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돼 지리산 빨치산 소탕작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1952년 만 31세의 나이로 한국군 사상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33세엔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 됐다. 영어를 잘 구사해 전쟁 중 미군(유엔군)과의 소통에도 역할이 컸다.
미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국군 증강 계획을 세워 한국군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1954년엔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에 임명돼 43개월 동안 재임하며 야전군의 기틀을 다졌다.
1957년엔 두번째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문재인 정부의 후원으로 그간 '무한 권력'이 돼 질주해 온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에게 실망한 국민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윤미향 사건이 터진 후, "문재인 정권 들어서 마치 벼슬을 단 것처럼 행동하던 이들의 위선을 자주 봐 와서 별로 놀랍지 않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완장찬 홍위병들의미친개들의 짓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그리고 이승만 전대통령을 폄훼하고 반동으로 몰아 대디만
조금있으면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강감찬 장군 등 한국의 모든 영웅들이
모두 반동으로 몰려 천하의 역적으로 몰릴판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백 장군의 6·25전쟁 전공(戰功)은 재론의 여지 없이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재향군인회는 지난 27일 발표한 성명에서 “백 장군은 창군 멤버로서 6·25 전쟁 시 최악의 전투로 알려진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며,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평양 탈환 작전을 성공시켰다”며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공인한 전쟁 영웅”이라고 했다.
◇31세 최연소 참모총장, 한국군 최초의 대장 기록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을 때 그가 사단장으로 지휘하던 육군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 유일하게 미군 1군단에 배속됐다. 지원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에서 6.25전쟁 중 대표적인 격전이었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겁에 질린 우리 군 병력이 뒤로 후퇴하고 무단 이탈도 생겼다. 그러자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고 다급히 전황을 알려왔다.
백 장군은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백 장군의 고군분투에 힘입어 한미 양국군은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다부동에서 패했다면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고, 남한이 적화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백 장군이 이끈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 1기병사단, 24보병사단 등과 치열한 북진 경쟁을 벌였다.
백 장군의 부대가 결국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평북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후퇴했다.
전쟁 중 1사단은 미군들로부터 “가장 잘 싸운 한국군 부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전쟁 중에도 국군과 경찰 유자녀, 전쟁 중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백선 유아원’을 설립했다.
1951년11월엔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돼 지리산 빨치산 소탕작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1952년 만 31세의 나이로 한국군 사상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33세엔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 됐다. 영어를 잘 구사해 전쟁 중 미군(유엔군)과의 소통에도 역할이 컸다.
미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국군 증강 계획을 세워 한국군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1954년엔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에 임명돼 43개월 동안 재임하며 야전군의 기틀을 다졌다.
1957년엔 두번째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문재인 정부의 후원으로 그간 '무한 권력'이 돼 질주해 온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에게 실망한 국민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윤미향 사건이 터진 후, "문재인 정권 들어서 마치 벼슬을 단 것처럼 행동하던 이들의 위선을 자주 봐 와서 별로 놀랍지 않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완장찬 홍위병들의미친개들의 짓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그리고 이승만 전대통령을 폄훼하고 반동으로 몰아 대디만
조금있으면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강감찬 장군 등 한국의 모든 영웅들이
모두 반동으로 몰려 천하의 역적으로 몰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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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2-12-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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