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2)
페이지 정보
김선택관련링크
본문
욥은 실제 체험이 있었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이성적인 선택은 그가 평소에 추구했던 것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했기 때문에 만물은 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기를 원했고, 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진실하게 경외할 수 있었으며, 그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진 것이다. 그의 온전함은 그를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그를 가장 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탄이 욥을 다시 시험하다
‘이성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문자적 해석은 이성과 생각이 논리에 맞아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적절한 언행과 판단, 적절한 규범을 가진 도덕적 기준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욥의 ‘이성적’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될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욥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인성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통해,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을 더욱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며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을 더욱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언행과 일 처리 원칙과 방침은 맹목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고, 매우 규범적이고 명확하며 아주 구체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았고, 각종 복잡한 사건의 관계들을 어떻게 균형 잡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았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길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도 알았으며,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줄 때와 거두어 갈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육체에 극심한 고통이 닥치고, 가족과 친구들의 권고가 임하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실제적인 행동으로 또다시 자신의 진실한 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욥의 진정한 모습: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음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이 몸에 악창이 난 후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때,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치료해 주는 이가 없었고,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이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이 난 상처를 긁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욥이 고통받던 기간 중 한 장면에 불과해 욥의 인성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욥은 이 기간에 그 어떤 말로도 이때의 심정과 생각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행동과 반응은 그의 인성을 진정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의 1장의 기록에서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리고 2장의 이 구절에서는 이 동방 사람 중 가장 큰 자가 뜻밖에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앞뒤의 2가지 묘사는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느냐? 이 대비를 통해, 우리는 욥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욥은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이 자기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하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후광을 즐기지도 않았다. 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욥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욥의 본질이었다.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다.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았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이 아내와 나눈 대화에서 욥의 또 다른 면의 인성이 모두에게 보여졌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9~10). 욥의 아내는 욥이 그런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 권고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호의’는 욥의 칭찬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욥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종을 부인하는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은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고 그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한 것이다. 욥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고, 책망과 질책도 담겨 있었다. 이것은 애증이 분명한 욥의 인성의 자연스런 발현이자, 그의 정직한 인성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사악한 풍조와 추세를 증오했으며, 그릇된 사설과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밀어냈다. 또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의 다양한 행동에서 욥의 인성을 볼 수 있다면,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다음으로 내가 이야기할 주제이다.
앞에서 나는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원인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만일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도 없고, 아주 냉혹하고 무정하며, 인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증오했겠느냐? 다시 말해, 욥의 마음이 강퍅하고 인간성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아파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한 것 때문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답이다. 욥은 마음씨가 착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했기에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에 자신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모든 행동은 사람이 배울 만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만큼은 사람들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들거나 다양한 평가를 내놓게 만들었다. 사실, 욥의 이 행동이야말로 욥의 인성과 본질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의 인성과 본질에는 숨기거나 과장된 것이 없었으며, 사람에 의해 가공된 것도 없었다. 그의 이 행동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선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넘치는 샘물같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욥이란 사람의 면면을 알고 난 후에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본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순전하고 정직하다’라고 한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고 진일보한 실제적인 앎과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또 그러한 앎과 깨달음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사탄이 욥을 다시 시험하다
‘이성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문자적 해석은 이성과 생각이 논리에 맞아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적절한 언행과 판단, 적절한 규범을 가진 도덕적 기준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욥의 ‘이성적’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될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욥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인성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통해,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을 더욱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며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을 더욱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언행과 일 처리 원칙과 방침은 맹목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고, 매우 규범적이고 명확하며 아주 구체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았고, 각종 복잡한 사건의 관계들을 어떻게 균형 잡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았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길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도 알았으며,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줄 때와 거두어 갈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육체에 극심한 고통이 닥치고, 가족과 친구들의 권고가 임하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실제적인 행동으로 또다시 자신의 진실한 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욥의 진정한 모습: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음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이 몸에 악창이 난 후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때,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치료해 주는 이가 없었고,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이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이 난 상처를 긁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욥이 고통받던 기간 중 한 장면에 불과해 욥의 인성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욥은 이 기간에 그 어떤 말로도 이때의 심정과 생각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행동과 반응은 그의 인성을 진정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의 1장의 기록에서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리고 2장의 이 구절에서는 이 동방 사람 중 가장 큰 자가 뜻밖에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앞뒤의 2가지 묘사는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느냐? 이 대비를 통해, 우리는 욥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욥은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이 자기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하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후광을 즐기지도 않았다. 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욥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욥의 본질이었다.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다.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았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이 아내와 나눈 대화에서 욥의 또 다른 면의 인성이 모두에게 보여졌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9~10). 욥의 아내는 욥이 그런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 권고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호의’는 욥의 칭찬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욥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종을 부인하는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은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고 그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한 것이다. 욥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고, 책망과 질책도 담겨 있었다. 이것은 애증이 분명한 욥의 인성의 자연스런 발현이자, 그의 정직한 인성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사악한 풍조와 추세를 증오했으며, 그릇된 사설과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밀어냈다. 또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의 다양한 행동에서 욥의 인성을 볼 수 있다면,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다음으로 내가 이야기할 주제이다.
앞에서 나는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원인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만일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도 없고, 아주 냉혹하고 무정하며, 인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증오했겠느냐? 다시 말해, 욥의 마음이 강퍅하고 인간성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아파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한 것 때문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답이다. 욥은 마음씨가 착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했기에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에 자신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모든 행동은 사람이 배울 만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만큼은 사람들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들거나 다양한 평가를 내놓게 만들었다. 사실, 욥의 이 행동이야말로 욥의 인성과 본질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의 인성과 본질에는 숨기거나 과장된 것이 없었으며, 사람에 의해 가공된 것도 없었다. 그의 이 행동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선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넘치는 샘물같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욥이란 사람의 면면을 알고 난 후에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본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순전하고 정직하다’라고 한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고 진일보한 실제적인 앎과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또 그러한 앎과 깨달음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추천 0
작성일2020-08-25 14:38
불꽃님의 댓글
불꽃
용하고 조유산이 하고, 용하고 양향빈이 하고 비교 할려고? 조유산이는 제 마누라 감옥 보내고 자기는 도망가서 양향빈이하고 사통한 남자고 ...양향빈이는 그런 남자와 사통한 여자인데 ... 욥하고 비교를 해 보겠다고?
관두셔, 찬물 마시고 정신 차리셔.
관두셔, 찬물 마시고 정신 차리셔.